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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불교 교단개혁

기사승인 2017.04.20  13: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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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천 장이랑의 동양학 산책]

   
▲ 동양학자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불교계는 식민지 불교체제의 해체와 교단 개혁을 위한 즉각적인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뒤를 이은 미국 군정은 기독교를 지원하고 불교를 차별하는 편향적 태도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속재산 처리법의 운영에서 불교 측의 재산권한을 배제한 것이었다. 더욱이 행정편의적 발상으로 식민지 불교체제의 상징인 사찰령을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교단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8·15 직후 일제 강점기 조계종을 재건한 집행부가 새 시대를 열고자 스스로 물러나고 ‘재경 유지 승려’가 주축이 되어 교단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교단의 인수·인계를 추진하면서 과도적 임시집행부인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45년 9월에 서울 태고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식민지불교의 상징인 사찰령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교단기구 구성과 본말사제를 대체한 도별 교무원제를 결의하였다. 또한 교정에 박한영(朴漢永), 총무원장에 김법린을 추대하고 종지, 종통, 교단기구 및 교단의 실무적 내용을 종합한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 반포하였다. 이 교헌에서 ‘조계종’이라는 종래의 종명이 ‘조선불교’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각종 혁신 단체들이 등장하여 식민지불교의 청산과 새로운 불교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동맹, 조선불교혁신회, 불교여성총동맹 등이 그들인데 각 단체만의 특징도 있었지만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31본산 제도의 폐지, 교구제·교도제·불교재산 통합의 실시, 사찰의 토지 소유 반대, 교단 및 민족 반역자 청산 등이었고 교단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까지 그 주장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단 집행부와 혁신단체 간에는 점차 교단개혁의 추진 방향과 속도에 대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양측에서 교단개혁안의 핵심으로 내세운 교도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대처승이 대다수인 교단 집행부에서 주장한 교도제는 신도의 조직화로 이해한 반면에,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지향한 혁신단체는 교도제를 대처승의 교도화로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사찰의 토지 소유에 대한 문제도 양측의 주장이 대립한 부분이었다. 결국 혁신단체 측은 당시 교단 집행부로는 식민지 불교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집행부는 혁신단체의 노선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의구심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은 대립은 혁신단체들이 연합하여 1946년 12월에 선학원을 중심으로 불교혁신총연맹을 발족하고, 1947년 5월에 조선불교총본원이라는 별도의 종단기구를 구성함으로써 극단으로 치달았다. 주목되는 것은 선학원 측의 비구승들이 이러한 혁신단체들의 움직임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교단운영 참여와 선원의 확장, 자치를 위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등에서 종권의 소외를 절감한 비구승들이 혁신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교단의 내분을 겪고 상호간의 이념적 공방도 끊이지 않은 가운데 총본원은 교단의 탄압 속에서 토지개혁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내분을 맞았다. 교단 집행부도 교단운영의 노선을 둘러싸고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등 안정을 이루지 못한 채 6.25 전쟁을 맞았다.

교단 운영상의 내분과 이념갈등으로 중앙의 불교계가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에 비구승들은 수행가풍의 진작을 위한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6년 해인사 가야총림의 창설이다. 가야총림은 교단 차원의 모범총림 창설안으로 마련된 것으로 수행승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수행할 수 있는 선원, 강원, 율원 등을 갖춘 종합 수도도량을 만든 것이다.

성철, 청담, 향곡, 자운, 월산, 혜암, 성수, 법전 등 젊은 수좌들이 모여 공동수행을 행한 봉암사 결사도 이즈음인 1947년께 시작되었다. 이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취지로 청정한 수행가풍을 되살리고 부처님께서 본래 뜻하신 계율, 교법의 준수 등 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수행결사였다.

한편 1947년에 만암이 백양사를 중심으로 결성한 고불총림역시 승풍 정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고불총림의 청규 중에는 승려를 정법중과 호법중으로 구분하고 그에 맞는 직분을 설정하여 교단 내의 대처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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